성조숙증 치료를 받던 아홉 살 여아가 어느 날부터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반년 만에 다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의 어머니는 그동안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이가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여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야 했고, 한때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담 치료를 받은 뒤 아이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다시 성장클리닉을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이런 사례를 마주할 때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곳은 병원 밖, 다시 말해 가정과 학교다. 성조숙증이나 저성장처럼 오랜 시간 추적 관찰과 꾸준한 내원이 필요한 질환에서, 아이가 갑자기 통원을 중단하거나 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인을 약물의 부작용이나 질환 자체의 문제로만 좁혀 보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임상에서 확인되는 상당수의 경우, 진짜 원인은 아이를 둘러싼 환경, 그중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부모가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이 확신 자체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최선의 방식이 실제로 아이에게 적절한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과도한 통제, 성적과 성취에 대한 압박, 아이의 감정을 살피기보다 결과를 앞세우는 태도는 부모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이에게 만성적인 불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부모는 사랑이라 믿고 행한 것이, 아이에게는 견뎌야 할 압박으로 축적되는 셈이다.
실제로 이번 사례의 아이도 그러했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과 학업, 생활 전반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아이가 그 관리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 그 결과 아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몸으로 드러냈다. 식사를 거부하고, 병원에 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치료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나 통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아기의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성장판이 닫히는 속도, 사춘기 호르몬의 변화, 체중과 식욕의 기복은 정서 상태와 긴밀하게 맞물려 움직인다. 그래서 소아청소년과 진료실에서는 신체 지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표정과 말투, 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긴장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아이가 갑자기 식사를 거부하거나, 특정 장소나 사람을 피하려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보내는 경고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소아 진료 현장에서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부모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는 믿음과,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은 때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한다. 아이의 몸에 나타나는 증상은 흔히 마음의 신호이며,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다. 아이를 향한 노력의 방향과 방식이 정말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아이의 눈높이에서도 여전히 최선인지, 부모 스스로 끊임없이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최선이다.

성조숙증 치료를 받던 아홉 살 여아가 어느 날부터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반년 만에 다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의 어머니는 그동안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이가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여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야 했고, 한때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담 치료를 받은 뒤 아이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다시 성장클리닉을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이런 사례를 마주할 때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로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곳은 병원 밖, 다시 말해 가정과 학교다. 성조숙증이나 저성장처럼 오랜 시간 추적 관찰과 꾸준한 내원이 필요한 질환에서, 아이가 갑자기 통원을 중단하거나 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인을 약물의 부작용이나 질환 자체의 문제로만 좁혀 보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임상에서 확인되는 상당수의 경우, 진짜 원인은 아이를 둘러싼 환경, 그중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부모가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이 확신 자체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최선의 방식이 실제로 아이에게 적절한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과도한 통제, 성적과 성취에 대한 압박, 아이의 감정을 살피기보다 결과를 앞세우는 태도는 부모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이에게 만성적인 불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부모는 사랑이라 믿고 행한 것이, 아이에게는 견뎌야 할 압박으로 축적되는 셈이다.
실제로 이번 사례의 아이도 그러했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과 학업, 생활 전반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아이가 그 관리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 그 결과 아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몸으로 드러냈다. 식사를 거부하고, 병원에 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치료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나 통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아기의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성장판이 닫히는 속도, 사춘기 호르몬의 변화, 체중과 식욕의 기복은 정서 상태와 긴밀하게 맞물려 움직인다. 그래서 소아청소년과 진료실에서는 신체 지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표정과 말투, 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긴장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아이가 갑자기 식사를 거부하거나, 특정 장소나 사람을 피하려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보내는 경고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소아 진료 현장에서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부모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는 믿음과,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확신은 때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한다. 아이의 몸에 나타나는 증상은 흔히 마음의 신호이며,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다. 아이를 향한 노력의 방향과 방식이 정말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아이의 눈높이에서도 여전히 최선인지, 부모 스스로 끊임없이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최선이다.